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1세 (문단 편집) === 외정 === 에드워드 1세는 내정으로 잉글랜드의 통치력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 [[웨일스]]를 제후로 두었지만 그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권은 거의 없었고, 잉글랜드의 왕들도 웨일스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웨일스의 통치세력에게 그리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웨일스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놀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그곳에서도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친히 원정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스의 토착 영주들과 싸워 이겼고 이들을 복속시켜 잉글랜드 국왕이 웨일스에서도 실권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이때 아들 에드워드 2세를 웨일스의 영주에 임명했는데, 이후로 잉글랜드의 태자들에게 '웨일스의 군주([[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별칭을 주는 관습이 생겼다.] 한편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던켈드 왕조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3세가 1286년 3월 18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 그날 밤 알렉산더 3세는 연회를 베풀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부인을 만나러 간다며 말을 타고 가다가 신하들과 따로 떨어진 상태에서 낙마사했다. 알렉산더 3세는 원래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거릿 하나 외에는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다.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거릿이 노르웨이 왕 [[에이리크 2세]]와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마거릿]]이[* 던켈드 왕조의 명군인 [[맬컴 3세]]의 부인 마거릿([[웨식스 왕조]]의 후손이기도 하다)이 시집올 때 스코틀랜드에 선진문명을 전파하여 스코틀랜드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후 150여 년이 지나 1250년에 시성되어 성녀 마거릿(St. Margaret)이 되었다. 원래 서양에서는 과거 성인/성녀들이나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기 마련인데,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성녀가 무려 할머니, 증조할머니라 그 이름을 안 붙여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 있었고 마가렛을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마가렛이 갑자기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즉위식도 치르지 못하고 노르웨이에서 배를 타고 오던 중 죽었다. 7살 어린 소녀에겐 힘든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존 발리올이라는 영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다. 1293년, 어린 조카를 대신해 파이프 백작위의 계승권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귀족 맥더프가 잉글랜드 왕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잉글랜드인 재판관이 심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 1290년 버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멋대로 위반한 것이라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1292년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하고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표하여 그에게 신서를 바친 시점에서 이전의 조약은 무효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해 에드워드 1세가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결국 1295년 2월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친 신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A000541.jpg]] 스콘의 돌을 가져가는 에드워드 1세. 그러자 격노한 에드워드 1세는 반역자 발리올을 왕국으로부터 추방한다는 판결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의 몰수를 공표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며, 던바 전투에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다음 그에게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도륙했고, 발리올을 사로잡아 폐위시킨 다음 그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그리고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임을 선포하며 스코틀랜드를 합병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 '스콘의 돌'이라고도 불리며 영어로는 'The Stone of Scone'이라 한다.]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거릿의 검은 십자가상마저 1296년에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버렸다.[* 이 스콘석은 에드워드 1세 이후로도 잉글랜드 및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의 대관식에 쓰였다. 1950년 크리스마스에 4명의 스코틀랜드 대학생이 이 돌을 훔치려다가 적발된 바도 있었고 이 돌이 런던에 있는 것에 대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불만 또한 대단하였다. 그래서 1996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반환된다. 스콘석 탈취사건은 2008년에 영화 '스톤 오브 데스티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다.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 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잔혹한 학살에 증오심을 품게 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에게 호의적인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등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해당 지역민들을 귀족, 시민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등 더욱 잔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잔혹한 학살은 역효과를 불러와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귀족과 민중들의 원한과 증오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나타난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군을 조직하여 수차례 잉글랜드 군대를 패퇴시켰다. 특히 월레스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와 마을들까지 공격하여 약탈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에드워드 1세는 토벌군 1만 5000명을 파견하여 폴커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 6000명을 격파했으며[* 전사한 스코틀랜드군이 2천 명이 넘었다. 다만 스코틀랜드군의 저항이 워낙 심하였기에 잉글랜드군도 사상자가 스코틀랜드군과 비슷한 숫자인 2천 명이나 나왔다.] 윌리엄 월레스도 붙잡아 그의 사지를 찢어 죽여서 본보기를 보였지만 끝내 스코틀랜드 저항군은 항복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